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라고 불리는 중동의 구전 설화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그 이름은 전설이었고, 저주였다.
셰에라자드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야기의 밤들. 그녀는 매일 밤, 왕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하지만——
단 하나의 기록되지 않은 구간이 있다. 901번째 밤부터, 1001번째 밤까지——총 100일간의 이야기.
아주 드물게 발견된 오래된 필사본은 그 밤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901번째 밤,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를 멈추었고, 그날 이후 왕국 전체가 기묘한 웃음에 사로잡혔다.』
이야기가 고갈되자, 죽음의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원하는 걸 줄게. 왕을 영원히 미치게 만들 힘을. 하지만—— 대신 나를 받아들여야 해.』
셰에라자드는 죽음보다 더 깊은 감정——증오에 무릎을 꿨다. 그 순간, 왕은 웃음에 중독되어 광기에 빠졌고, 왕국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날 이후, 그 밤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금기가 되었다.
서울, 2024년 겨울.
강도현, 28세.
그는 마지막으로 웃었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잊으려 했다. 웃음은 사치였고, 눈물조차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모든 게 이번 달만 넘기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매달 믿었다. 한 달만 버티면 된다고. 그러나 그런 믿음은 서서히 독이 되었다.
소액대출 앱 다섯 군데. 밀린 월세 세 달째. 단기알바, 일용직, 대리운전… 어디든 닥치는 대로 붙었지만 매번 끊겼다.
친구들은 하나둘 멀어졌다. “미안, 이번 달은 나도 빠듯해서…” “너 요즘 왜 이렇게 힘들어 보여?” “넌 원래 성실하잖아.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가끔 도움을 준 친구들에겐 오히려 미안했다. 고맙다는 말조차 못 꺼내게 만드는 부채감.
이제는 연락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섰다. 창백한 얼굴. 부은 눈. 갈라진 입술.
거울 속 자신이 더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건에 싸인 면도날을 꺼냈다. 손끝이 떨렸다.
『혹시 지금이라도, 누군가 한 사람만 날 부르면——』
그는 조용히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남기듯 적었다.
『나는 너무 오래 버텼다. 이젠 의미 없다.』
그때였다. 고장난 히터의 팬이 갑자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 너 3년 전에 했었지.』
순간, 휴대폰 화면이 꺼지고 욕실 거울에 문장이 떠올랐다.
『웃고 싶니? 아니면—— 그냥 사라지고 싶니?』
도현은 몸이 굳은 채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너머, 형체 없는 실루엣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움과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 가슴이 조여들고, 식은땀이 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욕실 문을 밀치듯 열고 나왔다.
심장이 뛰었다. 무엇인가 끈질기게 뒤따라오는 기분. 그 기이한 기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대로 거실을 지나쳐 현관 앞에 섰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도심을 질주하듯 빠져나온 그는 어둠과 습기로 눅눅한 골목에 서 있었다.
바닥엔 젖은 전단지가 흩어졌고, 벽엔 낙서처럼 문장이 덕지덕지 쓰여 있었다.
『901번째 밤은 돌아온다.』
그때, 담배 연기가 났다. 골목 어귀, 검은 후드를 쓴 남자가 있었다.
“그 표정,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야.”
도현은 몸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남자는 조용히 다가와 유리병을 내밀었다. 붉은 미소가 새겨진 병. 그 아래엔——
『Toxid』
“이건 약이 아니야. 선택이야.” “마시면 네가 마지막으로 인간이었을 때로 돌아가.”
그는 속삭였다.
“네 동생이 울며 너한테 안겼을 때—— ‘형이 다 막아줄게’라고 말했지.”
그 기억이 도현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넌 그 이후로, 한 번도 울지도 웃지도 않았어.” “이건 도피가 아니라 회복이야.”
“한 모금이면—— 감정이 사라진 대신, 네가 ‘사람’이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는 병을 열었다. 향처럼 퍼지는 붉은 기운. 기억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는—— 마셨다.
찬란한 황금빛 복도. 벽화와 석주로 가득한 공간.
그 끝, 미소를 띤 석제 가면. 그러나 눈은 X자로 깨져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901번째 밤…”
도현의 표정은 굳었고, 입꼬리는 얼어붙은 미소로 멈춰 있었다.
서울, 신촌.
도현은 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생체신호는 정상이었지만, 의식은 없었다. 입가에는 지워지지 않는 미소——
“901번째 밤…”
곧 구급차가 도착했다.
“이건… 단순한 약물 반응이 아닙니다.”
사이렌은 삼화의료원을 향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도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감염되고 있었다.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
그녀는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 내일을 얻기 위해.
그러나 단 하나——전해지지 않는 밤들이 있었다.
901번째 밤부터, 1001번째 밤까지.
『그 밤,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를 멈췄고 왕국 전체가 기묘한 웃음에 사로잡혔다.』
공식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그 이야기는 다시 깨어나고 있다.
그 이름은,
『톡시드 (Toxid)』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